하코다테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코다테 전쟁은 1868년 보신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메이지 정부에 저항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구 막부군과 메이지 정부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에노모토는 홋카이도로 이동하여 에조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메이지 정부군의 공격으로 1869년 6월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프랑스의 개입과 함께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변화를 보여주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쓰마에번 - 마쓰마에성
마쓰마에성은 홋카이도 마쓰마에정에 위치한 마쓰마에번의 거점으로, 1606년 처음 건설되어 에도 막부의 북방 경비 강화 정책에 따라 1854년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으며, 현재는 마쓰마에 공원 및 마쓰마에성 자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1869년 전투 - 하코다테 해전
하코다테 해전은 1869년 보신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에조 공화국 해군이 가이텐마루를 중심으로 신정부군 해군과 싸웠으나, 고테츠를 앞세운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여 메이지 유신 공고화에 영향을 미치고 일본 해군력 강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해전이다. - 1869년 전투 - 보신 전쟁
보신 전쟁은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에도 막부 붕괴와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게 했으며, 신정부군의 승리로 일본 근대화를 가속화하고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1869년 분쟁 - 삼국 동맹 전쟁
삼국 동맹 전쟁은 19세기 중반 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파라과이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막대한 인명 피해와 영토 상실을 겪었다. - 1869년 분쟁 - 보신 전쟁
보신 전쟁은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에도 막부 붕괴와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게 했으며, 신정부군의 승리로 일본 근대화를 가속화하고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코다테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보신 전쟁 |
전투명 | 하코다테 전쟁 (箱館戦争, Hakodate Sensō) |
다른 이름 | 고료카쿠 전투 (五稜郭の戦い, Goryokaku no tatakai) |
![]() | |
장소 | 홋카이도, 에조 공화국 |
기간 | 1868년 12월 4일 – 1869년 6월 27일 |
결과 | 제국군의 승리 |
추가 결과 | 보신 전쟁의 종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에조 공화국 |
지휘관 | |
일본 제국 지휘관 | 메이지 천황 |
일본 제국 지휘관 (계속) | 구로다 기요타카 |
일본 제국 지휘관 (계속) | 마스다 도라노스케 |
일본 제국 지휘관 (계속) | 시미즈다니 긴코 |
일본 제국 지휘관 (계속) | 야마다 아키요시 |
에조 공화국 지휘관 | 에노모토 다케아키 |
에조 공화국 지휘관 (계속) | 오토리 게이스케 |
에조 공화국 지휘관 (계속) | 히지카타 도시조 |
에조 공화국 지휘관 (계속) | 아라이 이쿠노스케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병력 | 7,000명 |
일본 제국 해군 | 증기 철갑선 1척, 증기 군함 9척 |
에조 공화국 병력 | 3,000명 |
에조 공화국 해군 | 증기 군함 11척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사상자 | 770명 (사망 및 부상) |
일본 제국 해군 손실 | 증기 군함 1척 침몰, 증기 군함 1척 파괴 |
에조 공화국 사상자 | 1,700명 (사망 및 부상) |
에조 공화국 포로 | 1,300명 포로 |
에조 공화국 해군 손실 | 증기 군함 2척 침몰, 증기 군함 3척 파괴, 증기 군함 3척 나포 |
2. 배경
1868년 4월, 에도성 무혈개성으로 보신 전쟁은 호쿠리쿠, 동북쪽으로 무대를 옮겼다. 5월 새 정부가 결정된 도쿠가와가 조치는 스루가, 도토미에 70만석을 감봉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약 8만명의 막부의 신하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많은 막부의 신하가 거리를 헤매는 것을 우려한 해군 부총재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에조치에 옛 막부의 신하를 이주시키고 북방의 방비를 개척하려고 꾀한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천황에게 정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세력과 도쿠가와 막부 정부 사이의 전쟁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쇼군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이후 쇼군의 수도인 에도를 점령했다.
쇼군 해군 부사령관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자신의 함대를 새 정부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1868년 8월 20일, 4척의 증기 군함( 가이요 마루, 카이텐, 반류, 치요다가타)와 4척의 증기 수송선( 간린 마루, 미카호, 신소쿠, 초게이) 그리고 2,000명의 선원, 이바 하치로가 이끄는 "유게키타이"(게릴라 부대) 36명, 쇼군 육군 부사령관 마쓰다이라 타로를 비롯한 전 막부 정부의 여러 관리들,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일원들(단장 쥘 브뤼네 포함)과 함께 시나가와를 출발했다.
8월 21일, 함대는 조시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났다. 이때 미카호는 침몰했고, 간린 마루는 심하게 파손되어 시미즈에서 붙잡힐 때까지 돌아갔다.
나머지 함대는 8월 26일, 새 정부에 대항하는 북방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의 중심지 중 하나인 센다이 항에 도착했다. 이 동맹에는 센다이, 요네자와, 아이즈, 쇼나이, 나가오카 등의 번이 참여했다.
황군은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와카마쓰 성을 함락시켰고, 센다이의 방어가 불가능해졌다. 1868년 10월 12일, 함대는 센다이를 떠났다. 이때 센다이 번이 막부로부터 빌린 두 척의 배(오에, 호오 마루)와 약 1,000명의 병력을 더 확보했다. 이 병력에는 오토리 케이스케휘하의 전 막부군, 히지카타 토시조 휘하의 신센구미 병사들, 히토미 가쓰타로 휘하의 유게키타이 그리고 육로로 센다이에 도착한 몇 명의 프랑스 고문( 포르탕, 마르랭, 부피에, 가르드)이 포함되었다.
2. 1. 에노모토 함대의 북행
에노모토는 새 정부의 군함 인도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4월 12일 악천후를 핑계로 함대를 다테야마 앞바다로 이동시켰다. 가쓰 가이슈의 설득으로 시나가와 앞바다로 돌아가 후지야마, 간코마루, 조요마루, 쇼카쿠마루 4척을 새 정부에 인도했지만, 가이요마루 등 주력함은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7월에 센다이번을 중심으로 하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서 지원 요청이 오자, 8월 20일 가이요마루를 기함으로 하는 8척으로 구성된 구 막부 함대(가이요마루, 반류, 단지그, 치요다 형 군함 4척과 간린마루, 조게이마루, 신소쿠, 미카호 운송 선박 4척)가 시나가와 해를 벗어나 센다이로 향했다.에노모토 함대에는 와카도시요리 나가이 나오유키, 육군봉행 마쓰다이라 다로 등의 중역 외에도 오쓰카 호키노조나 마루모 노리쓰네 등 창의대의 생존자와 히토미 가쓰타로나 이바 하치로 등 유격대, 그리고 구막부 군사고문단 일원이었던 쥘 브뤼네와 앙드레 카즈뇌브 등 프랑스 군인 등 총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승선하고 있었다.
에노모토 함대는 출항 다음날부터 악천후를 만나 이산되었고, 간린마루와 미카호 2척을 잃었지만 9월 중순까지 센다이 도나하마 앞바다에 집결했다. 즉시 함선 수리와 보급을 실시하는 한편, 쇼나이번 지원을 위해 치요다가타와 육병 약 100명을 태운 나가사키마루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오슈에치고 렬번동맹이 붕괴되었고, 요네자와번, 센다이번, 아이즈번 등 주요 번이 속속 항복했다. 쇼나이번도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항복하여 이로써 도호쿠 전선은 종결되었다.
에노모토 함대는 막부가 센다이번에 대여했던 수송선 다에마루, 호오마루를 더해 구와나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빈추마쓰야마번주 이타쿠라 가쓰키요, 가라쓰번 세자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육군봉행 오토리 게이스케, 구 신센구미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 등과 구막신으로 구성된 전습대, 충봉대, 센다이번을 탈번한 가쿠헤이타이 등의 병사를 수용했다. 에노모토 함대는 관군의 센다이성 입성을 받아 10월 9일, 도나하마에서 오시카 반도 기부의 오리하마(현 이시노마키시)로 이동했다. 그때, 히라가타구 총독 시조 다카우타에게 구막신 구제를 위해 에조지를 개척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2] 구막부군은 4,000명 가까이 불어났기 때문에 신정부군은 2,000명 정도의 군세를 이시노마키를 향해 진군하게 되었다. 전투가 될 것을 우려한 센다이번은 이시노마키의 거상을 통해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대량의 병량과 물자를 제공하고 철수시키도록 교섭했다. 에노모토는 이에 응해 함대에 정병 2,000명 가량을 선발하여 승선시키고 10월 12일 오리하마를 출항하여 미야코만을 향했다. 남겨진 구막부군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도망치지 못한 100명 이상의 병사가 신정부군에게 체포되어 해변에서 잇달아 참수당하고, 마을에 머리가 내걸렸다.
이시노마키를 철수한 에노모토 함대는 가이텐마루가 기센누마에서 막부가 센다이번에 대여했던 센슈마루를 나포했다. 미야코만에서 땔나무를 보급하고 10월 18일, 에조지를 향해 출항했다.
하코다테항에는 관군의 방비가 있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적전상륙을 하지 않고, 먼저 안전한 지점에 부대를 상륙시키면 병력 차이가 있는 신정부군을 야전에서 격파하는 것은 용이하다고 생각하여 하코다테 북쪽, 우치우라만에 면한 와시노키를 상륙 지점으로 삼아 10월 21일(그레고리력 1868년 12월 4일) 약 3,000명이 상륙했다.[3]
2. 2. 홋카이도 상륙
1868년 10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3,000명의 구 에도 막부군은 홋카이도에 도착했다. 10월 20일, 이들은 하코다테 뒤편 와시노키 만에 상륙했다. 히지카타 도시조와 오토리 케이스케는 각각 부대를 이끌고 하코다테로 진군, 마쓰마에 번의 저항을 제압하고 10월 26일 고료각을 점령하여 지휘 본부로 삼았다.
이후 홋카이도 남부 반도 장악을 위한 원정이 이어졌다. 11월 5일, 히지카타는 800명의 병력과 ''카이텐'', ''반료'' 군함의 지원을 받아 마쓰마에 성을 점령했다. 11월 14일에는 ''카이요 마루''와 ''신속''의 지원을 받아 에사시에 집결했으나, ''카이요 마루''가 폭풍우로 난파되고 ''신속''마저 침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역 저항을 모두 제압한 구 막부군은 12월 25일 에조 공화국을 건국, 미국을 모델로 한 정부를 조직하고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총재로 선출했다. 그러나 도쿄의 메이지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에조 공화국군은 프랑스-일본 혼합 지휘 체제 하에 편성되었다. 오토리 케이스케가 총사령관을 맡고 쥘 브뤼네가 보좌했으며, 4개 여단은 프랑스 장교들과 8명의 일본 준여단장이 지휘했다. 외젠 콜라슈는 하코다테 주변 요새화된 방어 시설 건설을, 앙리 니콜은 해군 재편성을 담당했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미국에서 구입한 철갑선 고테쓰를 중심으로 함대를 구성했다. 가스가, 히류, 테이보 1호, 요슌, 모슌 등 각 번에서 제공한 함선들이 포함된 천황군 함대는 1869년 3월 9일 도쿄를 출발, 북쪽으로 향했다.
3. 주요 전투
목구내(木古内)에서는 4월 12일, 육군봉행(陸軍奉行) 오토리 케이스케의 지휘하에 전습대(伝習隊), 액병대(額兵隊) 등이 달려와 쇼기대(彰義隊) 등과 합류하여 500명이 진을 쳤다. 신정부군(新政府軍)의 정찰병과 소규모 충돌을 되풀이했지만, 마쓰마에(松前)에서 패주해 온 부대를 합류시켜 목구내 주변 요충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4월 20일 새벽, 신정부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자 낮까지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구막부군(旧幕府軍)은 액병대와 유격대 등이 끝까지 버텼지만, 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이즈미자와(泉沢, 현 목구내정)까지 후퇴했다. 그 후, 혼다 고우시치로(本多幸七郎)가 이끄는 전습대 등의 원군을 더하여, 시리우치(知内)에 고립된 쇼기대 등 300명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목구내로 향한다. 고립되었던 부대도 목구내 돌입을 결정하고, 협공을 우려한 신정부군이 후퇴하여 목구내 탈환에 성공한다. 그러나 구막부군은 목구내를 버리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야부라이(矢不来, 현 북두시)까지 후퇴하여, 포대와 흉벽을 구축하고 진을 쳤다.
신정부군은 기코나이에서 기코나이구치와 마쓰마에구치의 군대가 합류했다. 4월 29일, 육군 참모 오타구로 코레노부가 1,600명을 이끌고 본도, 해안, 산상의 삼방에서 야부라이를 공격했다. 구막부군은 甲鉄(코테쓰), 카스가 등에 의한 함포 사격으로 돌격대 대대장 아마노 신타로와 나가이 가쿠신사이 등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붕괴되었다. 오토리 케이스케는 후카와(현・호쿠토시)에서 부대 재정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아리카와(현・호쿠토시)까지 후퇴했다. 아리카와에서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직접 지휘했으나 구막부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하코다테 방면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구막부군은 이 전투에서 160명의 전사자를 냈다.
토쿠가와 사쓰미의 지휘 아래, 돌격대와 전습대(伝習隊)로 구성된 300명은 4월 10일 다이바야마(台場山, 현 북두시(北斗市))에 도착하여 이틀에 걸쳐 16곳에 가슴벽을 구축하고 신정부군을 기다렸다. 13일 정오 무렵, 700명의 신정부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토쿠가와군은 가슴벽을 방패 삼아 소총으로 방어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신정부군은 계속해서 병사를 교체하며 공격을 반복했지만, 토쿠가와군은 빗속에서 2개 소대씩 교대로 소총을 쏘았다. 다음 날인 14일 새벽, 신정부군은 지쳐 이나쿠라이시(稲倉石)까지 후퇴했다. 구막부군이 발사한 총알은 3만 5천 발에 달했으며, 16시간에 걸친 격전이었다.
22일, 신정부군은 다시 공격을 시도하지만 토쿠가와군은 이를 격퇴했다. 23일 오후, 신정부군은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험준한 산을 올라가 측면에서 소총을 쏘아 내렸다. 그대로 밤새 격전이 벌어졌다. 24일 새벽에는 다키가와 주타로(瀧川充太郎)가 이끄는 전습사관대가 칼을 뽑아 적진에 돌격하여 혼란에 빠진 신정부군을 패주시켰다. 그럼에도 신정부군은 계속해서 새로운 병사를 투입했고, 구막부군은 뜨거워진 총열을 물통으로 식히면서 소총으로 계속 응전했다. 25일 새벽, 마침내 신정부군이 후퇴했다. 이후 신정부군은 이곳을 우회하는 길을 산중에 개척하기 시작했다. 4월 29일, 야부라이(矢不来)가 신정부군에게 돌파당하자 후퇴로가 끊길 위험에 처한 토쿠가와군은 고료각으로의 후퇴를 강요받았다.
구막부군에서는 오토리 케이스케가 고료각 북쪽 진입로에 해당하는 카메다 신도와 키쿄우노 등에 전습보병대, 유격대, 육군대 등을 배치하여 지휘하고 있었다.
5월 11일 새벽, 신정부군 4,000명이 대거 몰려왔다. 오토리는 동서를 종횡으로 누비며 스스로 대포를 쏘며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밤에는 고료각으로 후퇴했다. 또한, 구막부군이 고료각 북쪽에 급조한 사릉곽에서는 마츠오카 시로지로가 이끄는 일연대가 방어전을 펼쳤지만, 고료각과 중간에 위치한 곤겐다이바를 신정부군이 점령하자, 후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고료각으로 패주했다.
3. 1. 하코다테 점령
반군은 1868년 10월 20일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마쓰마에 번의 저항을 제압하고 10월 26일 고료각 요새를 점령했다.[4][7]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은 하코다테 뒤편 와시노키 만(鷲ノ木湾)에 상륙했고,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는 각각 하코다테 방향으로 부대를 이끌었다.구막부군은 상륙 후, 오토리 케이스케가 이끄는 부대가 도게시타(峠下)·나나에(七重) 방면에서, 히지카타 토시조가 이끄는 부대가 시카베(鹿部)·가와쿠미 고개(川汲峠)를 거쳐 유노가와(湯の川) 방면에서 각각 두 갈래로 나뉘어 하코다테로 진군했다.[4] 이들은 하코다테 부 지사(知事) 시미즈다니 키마사(清水谷公考)에게 사자(使者)를 파견하였으나, 10월 22일 밤 도게시타(峠下)에서 하코다테 부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시작되었다.[6]
10월 24일, 오토리군은 오오노무라(大野村)와 나나에무라(七重村)에서 하코다테 부군을 격파하였고, 히지카타군은 가와쿠미 고개에서 하코다테 부군을 패주시켰다.[4] 각지에서 패전을 거듭하자 시미즈다니 키마사는 고료가쿠(五稜郭)의 포기를 결정하고, 신정부군은 25일 아키타 번(秋田藩)의 요슈마루(陽春丸)와 전세 낸 프로이센의 타이판요호(タイパンヨー号)에 승선하여 아오모리(青森)로 후퇴하였다.[4] 구막부군은 10월 26일 고료가쿠에 무혈 입성하였고, 에노모토는 함대를 하코다테에 입항시켰다.
3. 2. 마쓰마에 번과의 전투
마쓰마에 번(松前藩)은 신정부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오슈에츠 열번 동맹에도 참여하는 이중적인 책략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존왕파인 정의대(正義隊)의 쿠데타로 신정부군에 가담하였다.[8] 구막부군은 마쓰마에 번에 항복 권고 사자를 보냈으나, 사자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무력 제압을 결정하였다.10월 27일, 히지카타 도시조를 총독으로 하는 700명이 마쓰마에 성(松前城)을 향해 육로로 출진하였다. 11월 1일에는 지우치(知内)[10]에서 마쓰마에 번병의 기습을 격퇴하고, 11월 5일 마쓰마에 성에 도착하였다. 그 사이, 11월 1일 바다에서 반류(蟠竜)가 마쓰마에를 포격하였다.
10월 28일 번주 마쓰마에 도쿠히로(松前徳広) 등 주력이 다테 성으로 이동하여, 과소병력(寡兵)만 남아 있던[12] 마쓰마에 성은 수 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잔존 성병들은 에사시(江差) 방면으로 패주하였다.[13]
[[파일:Republic of Ezo members.jpg|thumb|200px|박관정권의 각료
후열 좌측부터 고스기 마사요시(小杉雅之進), 에노모토 다이마(榎本対馬), 하야시 타케루(林董), 마쓰오카 이와키치(松岡磐吉), 전열 좌측부터 아라이 이쿠노스케(荒井郁之助), 에노모토 다케아키
11월 12일, 구막부군은 에사시(江差)로 진격하였으나, 이미 마쓰마에 번은 철병하였고, 카이요(開陽)를 중심으로 한 해군에 의해 무혈 점령되어 있었다. 이날 밤, 카이요가 좌초되었고, 구원을 위해 온 신속환(神速丸)도 좌초되었다. 결국 카이요는 침몰하였고, 구막부군은 제해권(制海権) 유지가 어려워졌다.
11월 10일, 마쓰오카 시로지로(松岡四郎次郎)가 이끄는 부대가 다테 성 공략에 나섰다. 11월 15일 다테 성은 함락되었으나, 번주 일행과 주력 병력은 이미 구마이시(熊石)로 후퇴해 있었다. 11월 22일, 구마이시에 도착했을 때, 번주 일행은 히로사키 번(弘前藩) 영지로 퇴각한 후였다. 남은 마쓰마에 번(松前藩) 군사 약 300명은 투항하여 에조지(蝦夷地) 평정이 완료되었다.
4월 11일, 마쓰마에를 방어하던 구막부군 500명이 에사시 탈환을 위해 출격했다. 신정부군을 격퇴하고 모구사까지 진출했으나, 신정부군의 키코우나이(木古内) 진출 소식에 마쓰마에로 후퇴했다.
4월 17일, 신정부군의 공격에 구막부군은 마쓰마에 성을 버리고 지우치(知内)까지 패주했다.
3. 3. 에조 공화국 수립
1868년 10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이끄는 3,000명의 구 막부군은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지역 저항을 제압하고 고료각 요새를 점령했다. 11월에는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가 이끄는 부대가 마쓰마에(松前) 성을 점령하고, 에사시(江差) 시에 집결했으나, ''카이요 마루(開陽丸)''가 폭풍우로 난파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1868년 12월 25일, 구 막부군은 미국의 정부 조직을 모델로 한 에조 공화국을 건국하고,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총재(総裁)로 선출되었다.[14] 그러나 도쿄의 메이지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4] 에조 공화국군은 프랑스-일본 혼합 지휘 체제 하에 편성되었으며,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와 쥘 브뤼네(Jules Brunet)를 비롯한 프랑스 장교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또한 외젠 콜라슈와 앙리 니콜 등 전직 프랑스 해군 장교들이 합류하여 방어 시설 구축과 해군 재편성을 담당했다. 한편, 구 막부군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통행세 징수, 화폐 사주조(私鋳) 등을 실시하여 하코다테 주민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15][16]
구 막부군은 다가올 신정부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에사시, 마쓰마에, 와시노키 등 지배 지역 연안에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14] 침몰한 카이요의 승무원들은 개척 담당이 되어 무로란의 수비와 개척에 종사하였다. [14]
부대명 | 부대장 | 인원 | 출신 | 배치 | 부대명 | 부대장 | 인원 | 출신 | 배치 |
---|---|---|---|---|---|---|---|---|---|
장의대(彰義隊) | 스가누마 산고로(菅沼三五郎) | 185 | 막신 | 아리카와~후쿠시마(有川〜福島) | 신선조(新選組) | 모리 츠네키치(森常吉) | 150 | 막신・제번 | 하코다테(箱館) |
소장의대(小彰義隊) | 시부사와 나리이치로(渋沢成一郎) | 54 | 막신(이치하시파) | 유노가와(湯の川) | 아이즈 유격대(会津遊撃隊) | 스와 츠네키치(諏訪常吉) | 70 | 아이즈번(会津藩) | 아리카와~후쿠시마(有川〜福島) |
유격대(遊撃隊) | 이바 하치로(伊庭八郎) | 120 | 막신 | 마쓰마에(松前) | 가쿠헤이대(額兵隊) | 호시 준타로(星恂太郎) | 252 | 센다이번(仙台藩) | 아리카와~후쿠시마(有川〜福島) |
육군대(陸軍隊) | 카스가 사에몬(春日左衛門) | 160 | 막신 | 마쓰마에(松前) | 겐코쿠대(見国隊) | 니세키 겐지(二関源治) | 400 | 센다이번(仙台藩) | 무로란(室蘭)・하코다테(箱館) |
전습사관대(伝習士官隊) | 다키가와 미쓰타로(滝川具綏|瀧川充太郎) | 160 | 막신 | 하코다테(箱館) | 카미키대(神木隊) | 사카이 요스케(酒井良助) | 70 | 다카다번(高田藩) | (미야코만) |
전습보병대(伝習歩兵隊) | 혼다 코우시치로(本田幸七郎) | 225 | 막부보병 | 고료가쿠(五稜郭) | 토류대(杜陵隊) | 이토 젠지(伊藤善次) | 75 | 모리오카번(盛岡藩) | 고료가쿠(五稜郭) |
충봉대(衝鋒隊) | 후루야 사쿠자에몬(古屋佐久左衛門) | 400 | 막부보병 | 와시노키~오사카베(鷲ノ木〜尾札部) | 포병대(砲兵隊) | 세키 히로에몬(関広右衞門) | 170 | 막부포병 | 각지 |
일련대(一聯隊) | 마쓰오카 시로지로(松岡四郎次郎) | 200 | 막부보병 | 에사시(江差) | 공병대(工兵隊) | 요시자와 유시로(吉沢勇四郎) | 70 | 막부공병 | 고료가쿠(五稜郭) |
기타 각 부대(사관 부속・사무 등) 100 / 해군 800 |
3. 4. 신정부군의 집결
10월 30일, 구막부군의 하코다테 점령 소식이 도쿄에 전해지자 신정부는 쓰 藩兵 등 약 1,000명을 아오모리로 파병했다.[18] 11월 6일, 야마다 겐기가 아오모리에 들어왔고,[18] 11월 19일에는 구막부군 토벌령이 발표되었다.[18] 11월 27일, 시미즈가야 키미카즈가 아오모리구 총독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동계 작전 준비 부족으로 하코다테 정벌은 이듬해로 미뤄졌다.[18]
메이지 2년(1869년) 2월, 마쓰마에 藩, 히로사키 藩兵 등 약 8,000명이 아오모리에 집결했다.[18] 해군은 미국의 중립 폐기 선언을 받아들여 최신예 철갑함 동함을 구입하고, 마스다 코노스케를 해군참모로 임명하여 함대를 편성했다.[18] 3월 9일, 신정부군 함대(갑철, 카스가 등 군함 4척과 수송선 4척)는 시나가와 앞바다를 출발하여 아오모리를 향해 출항했다.[18]
히로사키 | 2,207 | 마쓰마에 | 1,684 | 장주 | 781 | 비고후쿠야마 | 632 | 비젠오카야마 | 541 |
---|---|---|---|---|---|---|---|---|---|
쿠마모토 | 396 | 도쿠야마 | 300 | 사쓰마 | 293 | 치쿠고 | 243 | 쿠로이시 | 243 |
미토 | 219 | 쓰 | 199 | 에치젠오오노 | 170 | 하코다테 부 | 200 | 합계 | 8,108 |
3. 5. 미야코 만 해전
3월 20일, 일본 제국 해군이 미야코 항(미야코시, 이와테현)에 도착했다. 반란군은 제국 함대의 도착을 예상하고 강력한 신형 군함 고테쓰를 장악하기 위한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미야코만 해전으로 알려진 기습 공격을 위해 3척의 군함이 파견되었다. 정예 신센구미와 전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니콜이 탑승한 개천, 전 프랑스 장교 클라토가 탑승한 반룡, 그리고 전 프랑스 해군 장교 외젠 콜라슈가 탑승한 다카오였다. 기습을 위해 개천은 미국 국기를 달고 미야코 항에 진입했다. 그들은 고테쓰에 탑승하기 직전에 에조 공화국 국기를 게양했다. 고테쓰의 승무원들은 개틀링 건을 사용하여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공격자는 큰 손실을 입었다. 두 척의 에조 군함은 홋카이도로 도주했지만, 다카오는 추격을 받아 해변에 좌초되었다.
구막부군은 신정부군 함대가 미야코만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철갑선을 탈취하는 작전을 기획했다. 3월 20일, 해군봉행·아라이 이쿠노스케를 지휘관으로 하여, 육군봉행 겸·토다 사다히로 이하 100명의 육군을 태운 회천, 반룡, 하코다테에서 나포한 고성 3척은 미야코만을 향해 출항했다.
3월 23일, 폭풍우를 만난 3척은 지휘가 어려워졌고, 집결지인 야마다만에는 회천과 고성이 도착했지만, 반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고성은 증기기관 고장으로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어 회천 단독으로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3월 25일 새벽, 회천은 미야코만에 돌입하여 미국 국기를 내리고 일장기를 게양한 후, 전속력으로 철갑선을 향해 돌진했다. 기습은 성공했지만, 외륜선인 회천은 옆에 바짝 붙일 수 없어 철갑선의 측면에 함선의 선수를 박아 ‘丁자’ 형태라는 불리한 자세가 되었고, 철갑선보다 함선 높이가 3m 높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철갑선으로 이동하기 어려워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게다가 회천의 함선 선수에서 뛰어내린 구막부군 병사들은 철갑선에 장비된 가틀링포와 소총의 좋은 표적이 되어 잇달아 쓰러졌고, 미야코만 내 다른 함선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미야코만을 이탈했다. 회천 함장·코가 겐고, 옛 신선조의 노무라 리사부로 등 19명이 전사했다. 기관 고장으로 속도가 나지 않던 고성도 신정부군의 춘풍의 추격을 받아 타노하타무라 라가하마에 좌초시켜 불을 지르고, 승무원들은 모리오카번에 투항했다.
3. 6. 신정부군의 홋카이도 상륙
1869년 4월 9일, 제국군 7,000명이 홋카이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고료카쿠와 벤텐다이바 요새에서 최후 항전이 벌어질 때까지 여러 방어 거점을 점령했다.[1]하코다테만 해전은 1869년 5월, 일본 최초의 현대식 해군 간의 주요 해전으로 전투 말기에 발생했다.[1]
1869년 6월 최종 항복 이전에, 에조 공화국의 프랑스 군사 고문들은 하코다테만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해군 군함 ''쿠에트로곤''호로 탈출, 요코하마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갔다. 에조 공화국군은 병력의 절반 가까이와 대부분의 함선을 잃고 1869년 6월 27일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
미야코만 해전에서 승리한 신정부 함대는 3월 26일 아오모리에 도착, 영국 선박 오사카와 미국 선박 얀시를 용선하여 4월 초 상륙 준비를 완료했다.[20]
4월 6일, 해군육군 참모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가 이끄는 신정부군 1,500명이 아오모리에서 출발, 4월 9일 새벽 오토베(乙部)에 상륙했다. 구막부군은 상륙 저지를 위해 에사시(江差)에서 1개 연대 150명을 파견했으나, 이미 상륙을 마친 신정부군 선봉의 마쓰마에(松前) 병력에 격퇴되었다. 육군 병력이 소규모 접전을 벌이는 동안, 가스가(春日)를 중심으로 한 신정부군 군함 5척은 에사시 포격을 개시했다. 에사시 포대는 반격했지만, 적함에 포탄이 미치지 못했고, 에사시 부교(奉行) 마쓰오카 시로지로(松岡四郎次郎) 등 구막부군은 마쓰마에 방면으로 후퇴했다.
신정부군이 에사시를 탈환하자, 4월 12일 육군 참모 구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가 이끄는 2,800명, 4월 16일 증원부대가 에사시에 상륙, '''마쓰마에구(松前口)'''(해안을 따라 마쓰마에로 향하는 길), '''키코우치구(木古内口)'''(산을 넘어 키코우치로 향하는 길), '''니마타구(二股口)'''(오토베에서 우즈라(鶉)·나카야마 고개(中山峠)를 넘어 오오노(大野)로 향하는 길), '''야노로구(安野呂口)'''(오토베에서 우치우라만(内浦湾)에 면한 오치베(落部)로 향하는 길)의 4개 루트로 하코다테 진군을 시작했다.
한편, 구막부군에서는 4월 14일, 센다이번(仙台藩)을 탈번한 니세키 겐지(二関源治)가 이끄는 미쿠니대(見国隊) 400명이 영국 선박으로 와시노키(鷲ノ木) 근처 사하라(砂原)에 도착, 무로란(室蘭) 및 하코다테 방위에 투입되었다.
3. 7. 하코다테 총공격
1869년 4월 9일, 메이지 정부군 7,000명이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고료카쿠와 벤텐다이바를 향해 진격했다.[1] 4월 28일, 아오모리구 총독 시미즈다니 공고가 에사시에 상륙하고, 5월 1일 이후 마쓰마에・키코우치에서 진군한 동하군과 후타마타에서 진군한 남하군이 아리카와 부근에 집결하여 하코다테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5월 2일에는 브뤼네 등 프랑스 군인들이 하코다테를 탈출했다.[21]5월 11일 오전 4시, 신정부군은 해륙 양면에서 상륙을 개시하며 하코다테 총공격을 시작했다.[23] 구 막부 해군은 5월 3일 밤 유격대 스파이 사이토 준사부로에 의해 벤텐다이바의 대포가 사용 불능이 되었고, 5월 6일에는 홋카이도만에 설치한 밧줄이 절단되어 신정부군 군함이 홋카이도만으로 진출했다. 5월 7일 하코다테만 해전에서 회천이 증기 기관을 파괴당하고 부유 포대가 되었다.[24] 5월 11일 해전에서는 반룡이 조양을 격침시켰으나, 포탄을 다 써 좌초되었고 승무원들은 벤텐다이바에 합류하였다.[25]
같은 날 새벽, 흑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신정부군 700명이 하코다테야마 뒷면에 상륙했다. 흑다가 직접 이끈 부대는 函館山 정상에 도달하여 감시병들을 몰아내고 函館山을 점령했다. 函館山 수비는 신선조가 맡았는데, 오토리 케이스케는 짙은 안개 속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신선조의 태만이었다고 비판했다.[26] 函館山을 점령한 신정부군은 막부 함대와 시내 경비를 담당하던 연습 사관대를 공격했다.[26]
토지미츠 히사미츠는 벤텐다이바 구출을 위해 잇폰기 세키몬 부근에서 지휘 중 저격을 받아 전사했다.[27] 쇼기타이 두령 테라자와 마사아키에 따르면, 토지미츠는 패전 소식을 듣고 명예 회복을 위해 벤텐다이바로 향하던 중 막부 함대가 적함을 격침시키자 전진을 명령했다고 한다.[26]
신정부군의 기습 상륙에 하코다테 봉행 나가이 타카시는 벤텐다이바 방비를 강화하고, 타키가와 미츠타로가 신선조, 연습 사관대를 이끌고 函館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상으로부터의 공격과 오오모리하마 앞바다의 요슈로부터의 함포 사격으로 잇폰기 세키몬 부근까지 후퇴하고, 결국 고료카쿠까지 후퇴했다. 하코다테 정부군 부총재 마쓰다이라 타로는 하코다테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고료카쿠, 벤텐다이바, 치요가다이 진야만이 남게 되었다.
오전 11시경 신정부군은 하코다테 시가지를 장악했다. 벤텐다이바의 구막부군이 방화하여 872호가 소실되었다.[28] 하코다테 시립병원 원장 타카마쓰 료운은 적십자사 정신으로 병원의 비무장 중립을 선언하고 전상자 치료에 임했다.[29]
5월 12일에는 고료카쿠에 대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후루야 사쿠자에몬이 중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속출하고, 구막부군에서는 탈영병이 잇따랐다.
3. 8. 에조 공화국의 항복
1869년 4월 9일, 메이지 정부군 7,000명이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고료카쿠와 벤텐다이바 요새를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이 벌어졌다. 1869년 5월, 일본 최초의 현대식 해전인 하코다테만 해전이 벌어졌다.[1] 에조 공화국군은 병력의 절반과 대부분의 함선을 잃고, 1869년 6월 27일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5월 12일 밤, 신정부군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는 무라하시 히사나리(村橋久成)와 이케다 지로베에(池田次郎兵衛)를 통해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에게 항복을 권고했다.[30] 에노모토는 이를 거절했으나, 네덜란드 유학 시절 입수한 해상 국제법 서적 『해률전서(海律全書)』[31][32]를 구로다에게 보냈다.[33] 5월 15일, 벤트엔다이바(弁天台場)의 나가이 나오유키(永井尚志) 이하 240명이 항복했다. 5월 16일, 치요가다이 진야(千代ヶ岱陣屋)에서 나카지마 사부로스케(中島三郎助)와 두 아들이 전사했다.
같은 날, 구로다는 『해률전서』의 답례로 에노모토에게 물품을 보냈고, 에노모토는 이를 받아들여 휴전을 요청했다. 막부군 수뇌부는 항복을 결정했고, 에노모토는 자결하려 했으나 오츠카 카쿠노죠(大塚霍之丞)에게 제지되었다.
5월 17일, 에노모토 등은 구로다 등과 회견하여 병사들의 관대한 처분을 탄원했으나, 구로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노모토는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고, 항복 서약서를 카메다 하치만구(亀田八幡宮)에 봉납했다.
5월 18일(그레고리력 1869년 6월 27일), 에노모토 등은 카메다(亀田)의 둔소에 출두하고, 고료카쿠가 개성되었다. 약 1,000명이 투항하여 무장 해제가 완료되었고, 하코다테 전쟁 및 보신 전쟁(戊辰戦争)이 종결되었다. 무로란(室蘭)의 개척봉행 사와 타로자에몬(澤太郎左衛門) 이하 250명은 6월 11일 하코다테에 도착하여 투항했다.

4. 전후 처리
이 전투는 일본의 봉건 구체제의 종말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무력 저항의 종식을 의미했다. 몇 년간의 투옥 후, 반란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복권되어 새롭게 통일된 일본에서 눈부신 정치 경력을 쌓았다. 특히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메이지 시대에 여러 부처의 직책을 맡았다.[36]
마침내 안정을 찾은 새로운 제국 정부는 분쟁 종식 직후 수많은 새로운 제도를 수립했다. 특히, 1869년 7월에 공식적으로 창설된 제국 해군은 函館(하코다테) 전투에 참전했던 많은 전투원과 함선을 편입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자 미래의 제독인 도고 헤이하치로는 노 젓는 증기선 ''카스가''에 포수로 참전했다.
항복한 구막부군의 장병들은 일단 하코다테의 사찰 등에 수용된 후, 히로사키 번 등에 맡겨졌고, 대부분은 이듬해 석방되었다. 간부에 대해서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마쓰다이라 타로(松平太郎),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아라이 이쿠노스케(荒井郁之助), 나가이 히사시(永井尚志), 마쓰오카 이와키치(松岡磐吉), 소마 켄케이(相馬主計) 7명이 도쿄 다쓰노구치(辰の口)의 군무관규문소(軍務官糾問所) 감옥에 투옥되었다(메이지 5년 석방).[36]
5. 역사적 의의
5. 1. 근대화
일본의 근대화는 일반적으로 메이지 시대(1868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인 1853년경부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막말). 1869년 하코다테 전투는 증기력과 총기가 핵심 역할을 하는 근대적인 분쟁에서 두 명의 정교한 적대자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일부 전통적인 전투 요소가 남아 있었지만, 1720년경부터 '랑학'(서양 과학 연구)을 통해 많은 서양 과학 및 기술 지식이 이미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1853년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국가 근대화와 외국 영향 개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어떤 의미에서, ''존왕양이'' 이념에 기반한 복고 운동은 이러한 근대화와 국제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결국 메이지 천황은 ''부국강병''("부유한 나라, 강한 군대") 원칙에 따라 유사한 정책을 선택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사쓰마번 출신의 그의 전직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
5. 2. 프랑스의 개입
제1차 프랑스 일본 군사 고문단 소속 쥘 브뤼네가 이끈 그룹은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전(前) 도쿠가와 막부(幕府, ''bakufu'') 군을 훈련시켰고, 하코다테 전투에서 이들과 함께 싸웠다.하코다테 전투는 프랑스가 일본의 사정에 강하게 개입했던 시기를 보여준다. 다른 서구 열강도 일본에 대한 이해관계와 행동이 중요했지만, 프랑스보다는 덜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개입은 나폴레옹 3세 치하 프랑스 제국의 광범위하고 종종 비참했던 외교 활동의 일부이며, 멕시코 원정에 이어 발생했다. 일본 동맹군과 함께 북쪽으로 간 프랑스 고문단원들은 모두 프랑스 군대에서 사직하거나 탈영한 후 동행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곧 복권되었고 쥘 브뤼네와 같이 일부는 화려한 경력을 계속 이어갔지만, 그들의 개입은 미리 계획되거나 정치적으로 주도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과 신념의 문제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다. 1872년 제2차 군사 고문단이 초청되었고, 1880년대에는 프랑스 기술자 에밀 베르탱의 감독하에 일본 제국 해군의 최초의 진정한 현대 함대가 건조되었다.
참조
[1]
문서
Lesser preceding actions were the Battle of Shimonoseki Straits (1863) and Battle of Awa (1868).
[2]
서적
p79
1983
[3]
서적
p695
1988
[4]
웹사이트
函館市史通説編第2巻 10月20日
http://www.lib-hkd.j[...]
2014-04-15 #추정 날짜. 원본에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추정하여 추가.
[5]
웹사이트
函館市史通説編第2巻 10月20日
http://www.lib-hkd.j[...]
2014-04-15 #추정 날짜. 원본에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추정하여 추가.
[6]
서적
p698
1988
[7]
서적
p212
1998
[8]
서적
p140
1984
[9]
서적
p213
1998
[10]
문서
知内から先が松前藩領。
[11]
서적
p216
1998
[12]
문서
江戸時代最後期に「対ロシアを見据えた沿岸防御」のために築城された松前城は小規模であり、かつ、築城の目的と構造上、正面(海側)に特化した構造となっており、背面(搦手)側は防御力的には未完と言っていい状態であった。
[13]
서적
p710-711
1988
[14]
서적
p237
1998
[15]
웹사이트
函館市史通説編第2巻 脱走軍支配下の箱館
http://www.lib-hkd.j[...]
[16]
서적
p245-246
1998
[17]
서적
p78-80
2006
[18]
서적
p727
1988
[19]
서적
p257
1998
[20]
서적
p259
1998
[21]
서적
p282
1998
[22]
서적
p283-285
1998
[23]
서적
幕末実戦史
NDLDC|900018
[24]
서적
p286-287
1998
[25]
서적
p291
1998
[26]
서적
新選組隊士録
新紀元社
2011
[27]
문서
狙撃地点は一本木のほか、鶴岡町、異国橋と諸説ある。
[28]
웹사이트
函館市消防本部「函館の大火史」
http://www.city.hako[...]
2014-04-15
[29]
서적
p187
1983
[30]
서적
p322
2007
[31]
서적
p320
1984
[32]
문서
現在は宮内庁所蔵。
[33]
문서
このとき黒田は、榎本が国際法に精通していることに感銘し、戦後、榎本の助命に奔走することになる。
[34]
서적
p198
1983
[35]
웹사이트
函館市公式観光情報“はこぶら” 亀田八幡宮
http://www.hakobura.[...]
2014-04-15
[36]
서적
菊池・伊東(1998) p306
199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